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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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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영은 촉한의 초대 황제 유비의 아들이자 유선의 이복 동생이다.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후 노왕에 봉해졌으며, 230년에는 감릉왕으로 작위가 변경되었다. 유선 시대에 환관 황호와 갈등을 겪었고, 촉한 멸망 후에는 위나라의 낙양으로 이주하여 봉차도위로 임명되었다. 유영의 손자 유현은 영가의 난을 피해 익주로 도망쳐 성한의 이웅에게 안락공으로 봉해졌다. 유영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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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 (촉한)
기본 정보
촉한의 유영
유영의 초상화
유영 (劉永)
공수 (公壽)
생몰년도207년 ~ 221년 사이 출생, 사망년도 미상
신분
작위노왕 (魯王) (221년 7월 ~ 230년)
감릉왕 (甘陵王) (230년 ~ 263년)
가계
아버지유비
생애
초기 생애유비의 아들로 태어남
책봉221년 7월, 노왕에 책봉됨
작위 변경230년, 감릉왕으로 작위가 바뀜
정치적 상황유선의 총애를 받지 못함, 황호의 모함으로 멀리 떨어져 지냄
항복263년, 촉한이 멸망하자 조위에 항복함
이후낙양으로 이주하여 봉작을 받음,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지지 않음

2. 생애

유영은 유비의 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유선의 이복 동생이었다. 221년 유비가 황제가 된 후 노왕(魯王)에 봉해졌으나, 230년 감릉왕(甘陵王)으로 작위가 변경되었다.[1][2][3]

유영은 환관 황호와 사이가 좋지 않아, 황호의 참언으로 인해 유선에게 10년 넘게 냉대를 받았다.[4] 264년 촉한이 멸망한 후, 위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이주하여 봉거도위(奉車都尉)와 향후(鄉侯)에 봉해졌다.[5] 유영의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유영의 손자 유현은 영가의 난에서 살아남아 성한의 이웅에게서 안락공(安樂公)으로 임명되었다.[6]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유영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유비후한 말의 군벌로, 삼국시대에 촉한을 건국한 황제였다. 그의 어머니는 유비의 첩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유비의 뒤를 이어 촉한의 두 번째 황제가 된 유선의 이복 동생이었다.[1]

장무 원년(221년), 아버지가 황제에 즉위하자 노왕에 봉해졌다.[2] 장무 3년(223년), 백제성에서 병에 걸린 아버지를 문병했지만, 아버지는 병사하고 형인 유선이 황위를 이었다.

2. 2. 노왕 책봉과 감릉왕으로의 변경

유비후한 말의 군벌이자 삼국 시대 촉한의 황제가 된 후, 221년 7월 경, 황제 즉위 3개월 만에 사도 허경을 사신으로 보내 유영에게 "노왕"(魯王) 작위를 수여했다.[2]

229년, 촉이 동맹국 와 협의하여 멸망 후를 가정한 천하 분할을 결정했는데, 이때 노나라 지역이 오나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230년유선에 의해 감릉왕으로 작위가 변경되었다.[3]

2. 3. 황호와의 갈등과 유선의 냉대

유영은 유선이 신뢰하고 총애했던 환관 황호를 미워했다. 황호가 권력을 잡은 후, 유선 앞에서 자주 유영을 헐뜯었고, 그 결과 유선은 유영을 냉대하여 10년 넘게 그를 만나지 않았다.[4] 연희 9년 (246년) 동윤이 사망하고, 황호가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자 서로 반목하던 유영과 황호는 더욱 대립했고, 황호는 유선에게 참언했다. 이를 믿은 유선에 의해 유영은 유비의 유조를 받았음에도 10년이 넘도록 조정에 참례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4]

2. 4. 촉한 멸망과 조위에서의 삶

264년, 위나라의 촉 정복으로 촉나라가 조위에 정복된 지 1년 후, 유영은 위나라의 수도인 낙양으로 이주했다.[5] 위나라 정부는 그를 봉거도위(奉車都尉)로 임명하고 향후(鄉侯)로 봉했다.[5]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유영에게는 손자인 유현( 劉玄|유현중국어 )이 있었는데, 311년 영가의 난에서 살아남았다.[6] 손성은 《촉십보(蜀氏譜)》에서 347년(동진 진 목제 연호 '영화' 3년)에 이세 (성한 정권의 마지막 통치자)를 상대로 한 원정 중 성도에서 유현을 만났다고 언급했다. 손성은 성한 정권의 창시자인 이웅이 유현이 영가의 난 혼란 중에 촉으로 도망친 후 안락공(安樂公)으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6]

2. 5. 사망과 손자 유현

유영의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유영의 손자인 유현(劉玄, 307 - 347)은 311년 영가의 난에서 살아남았다.[6] 손성은 그의 《촉십보(蜀氏譜)》에서 진 목제의 연호인 '영화' 3년(347년)에 이세 (성한 정권의 마지막 통치자)를 상대로 한 원정 중 성도에서 유현을 만났다고 언급했다. 손성은 성한 정권의 창시자인 이웅이 유현이 영가의 난 혼란 중에 촉으로 도망친 후 그를 안락공(安樂公)으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6]

3.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유비촉한의 초대 황제
어머니미상유비의 첩
유선촉한의 2대 황제 (후주)
이복 형유리유비의 아들
손자유현영가의 난을 피해 익주로 돌아가 성한의 군주 이웅에 의해 안락공에 봉해짐


4. 평가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전 출력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hu Shi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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